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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애인

zephyr 2013. 8. 28. 12:03

유안진의 '옛날 애인을 아시나요?'

봤을까?
날 알아봤을까?

유안진 시인의 ‘옛날 애인’이라는, 단 두 줄짜리 시입니다.

엊그제 옛날 애인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어느 모임에 갔는데 건너편에서 자꾸만 나를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시선이 마주칠 때, 느낌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누굴까? 그냥 아는 사람이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저보다 성질이 더 급했나 봅니다. 저에게 다가와 “저... 혹시...” 하며 내 이름을 묻지 않겠습니까? 저는 알았습니다. 그 여인이 “저... 혹시...” 할 때, 그가 누구라는 것을.

그 여인은 우리 집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살았습니다. 내가 그 여인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 올리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 아닌, 그녀의 발자국 소리입니다. 고등학교 때, 저는 친구의 소개로 난생 처음 미팅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그때 만난 여인이 그 여인입니다. 나도 책을 좋아했고, 그 여인도 책을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책이 없었고, 그 여인에게는 책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심심찮게 나에게 책을 빌려주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밤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저에게 책을 주기 위해 집으로 불쑥 찾아왔습니다. 가족들도 모두 있는데. 어머니가 대문을 열어줬고, 나는 마루에서 그 책을 받았고, “고마워....” 단지 그 한 마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 여인은 “그럼 갈게...”하고 대문을 나섰습니다. 나는 “잘가...”하면서도 대문 밖으로 따라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형제들이 6형제인데 형제들이 우리의 그 장면을 쭈루륵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짜식... 하면서.

그때 그 여인을 따라 배웅한다는 것이 왠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마당에 선채로 그 여인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당에서 그 여인이 건네준 책을 훑어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1분도 지나고, 2분도 지났을 것입니다. 우리 집 대문 앞에서 후다닥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여인의 발자국 소리였습니다.

그 여인은 당연히 내가 배웅을 해 줄 것이라 믿고, 대문 앞에서 저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때가 밤이었고, 일부러 저에게 책을 건네주러 왔는데...

그 여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때라도 뛰어가서 그 여인을 배웅했어야 했습니다. 제 맘은 그 여인을 향해 뛰어가는데 저의 몸은 그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여인은 그 달빛아래 혼자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습니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책을 건네주기 위해 저를 찾아왔는데 집까지의 배웅은커녕, 마당에서 “잘가..” 한마디를 건넨 그 남자를 어찌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금 같으면, 당연히 집까지 배웅을 해줬을 것입니다. 말 없이 길을 걷다가 어느 골목길을 지날 때는 가느다란 떨림으로 가만히 그녀의 손이라도 잡아줬을 것입니다. 그랬을 것인데, 그 때는 제가 참 경우가 부족했고, 촌놈이었나 봅니다.

그 여인을 엊그제 만났습니다. “반갑다...” 할 수도 없고, “반갑습니다...” 할 수도 없는 사이. 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니 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나 봅니다.

옛날 애인의 얼굴을 보면서 여고시절의 싱그러운 얼굴은 다 어디로 가고 그대도 많이 늙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젠가 혼자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여인을 혹시라도 다시 만나면, 그날 밤 그 일을, 그이에게, 꼭 사과하고 싶다는 그 생각을 했습니다.

그 여인을 떠나보낸 건 가을이었습니다. 이별의 사연까지야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날 이후 가을이 되면 가끔 그 여인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도 자꾸만 아내가 눈에 밟히네요. 아내가 이 글을 보고 “아니, 이 인간이?”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노영심의 노래 중에 ‘그리움만 쌓이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게 전개되지요...

아! 이별이 그리 쉬운가!

세월 가버렸다고 이젠 나를 잊고서
멀리 멀리 떠나가는가...


아! 나는 몰랐네
그대 마음 변할 줄...

그렇습니다. 지금이야 쉽게 말하지만 이별이 어찌 그리 쉬웠겠습니까? 최백호도 가을엔 떠나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여인은 가을에 제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렇게 떠나간 여인이 30년이 훨씬 지난 뒤에 “저... 혹시...”하고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제 맘이 설레였을까요? 안 설레였을까요? 안 설레였습니다.

엊그제 선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떠난 여인과 OB난 골프공은 절대 찾지 말라고. 찾아놓으면 다시 떠난다고. 반갑기는 했지만 설레지 않은 것은 30년이 지난 세월의 힘이겠지요.

봤을까?
날 알아봤을까?

이렇게 찾아야 할 ‘옛날 애인’이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가을에 어느 자리에선가, 우연히라도 “저... 혹시...”하며 찾아가거나 찾아올 옛날 애인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녁에 아내에게 혼날 얘기만 했습니다. ㅋㅋ

고운 하루 되십시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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