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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칼럼

zephyr 2013. 5. 1. 09:55

[박정훈 칼럼]

日 국수주의자들이 찔러대는 우리의 급소

19년동안 반복된 北核 리스크, 엔低에 흔들리는 제조업 기반
'초고속 고령화'라는 시한폭탄… '한국 몰락' 근거로 제시돼…
일본, 아베 리더십으로 反轉… 새 변곡점 접어든 日과의 경쟁


	박정훈 부국장 겸 기획에디터

 
박정훈 부국장 겸 기획에디터
 

19년 전, 김일성 정권이 처음으로 핵 협박에 나선 이후 우리에겐 북한의 버릇을 고칠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 우리가 단호한 원칙으로 일관되게 대응했다면 적어도 지금 같은 막가파식(式) 깡패 짓은 못 했을 것이다. 우리는 돈까지 퍼주며 19년을 허송세월했고 북한을 통제 불가능한 폭탄으로 키웠다. 지금 우리가 북한의 협박을 잘 버티고 있다지만 속으론 경제가 골병들고 대외 신인도도 조마조마하다. '북한 리스크'는 우리가 천형(天刑)처럼 껴안고 가야 할 족쇄가 됐다.

일본 국수주의 진영의 대변지인 S월간지 최근 호에 눈길 끄는 기사가 실렸다. '일·한(日韓), 일·중(日中) 재역전'이라는 문패 아래 "한국·중국에서 '몰락의 잔치'가 시작됐다"는 제목을 주먹만 한 활자로 뽑았다. 동북아 3국 간 국력 경쟁에서 한·중의 약진이 끝나고, 일본이 다시 우세에 서게 됐다는 요지다. 잡지가 한국 몰락의 근거 중 하나로 제시한 것이 북한 리스크다. 한국은 김정은이 벌이는 핵 도발의 치킨게임에서 외통수에 걸렸고 여기서 탈출할 길이란 없다는 것이다.

S지(誌)는 일본 내 전투적 국수주의자들의 '혼네(本音·본심)'를 대변해온 잡지다. 우리에게 감정적 비난을 퍼붓던 그들이 "한국 몰락"을 외친다 해서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그런데 그들이 내세운 한·일 재역전 논리가 아프게 다가왔다. 부분적 과장과 비약은 있을지언정, 우리가 막연히 그럴 거라 여겼던 급소를 이 잡지는 거칠게 찔러대고 있었다.

북한 리스크와 함께 S지가 주장하는 한국의 약점은 기술력 없는 제조업의 기초 부실이다. 한국은 기술자가 천대받는 문화여서 일본 같은 치열한 장인(匠人) 정신이 없고 그 결과 핵심 기술력을 축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간 한국 제조업이 잘나간 것은 온 나라가 희생하며 밀어준 원화(貨) 약세 덕이었다. 아베 정권이 엔저(低) 드라이브를 걸자 환율 거품은 꺼졌고, 한국식 비즈니스 모델은 붕괴 위기에 몰렸다고 잡지는 주장했다.

더 치명적인 급소는 초고속 고령화라는 시한폭탄이다. 우리는 충분히 부자가 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령화 폭탄을 맞았다. 일본은 소득 4만달러 때 고령화가 본격화됐지만, 우리는 그 절반인 2만달러에서 일본보다 더 빨리 늙고 있다. 잡지의 결론은 저주에 가깝다. "인류 역사상 최고 속도로" 진행 중인 고령화 때문에 한국은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 국수파의 삐뚤어진 한국 폄하라고 웃어넘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기술력으로 세계무대에서 통하는 기업이 우리에게 몇 개나 있는가. 대기업은 원화 약세 혜택을 누리면서도 이익을 나누기는커녕 하도급 기업을 쥐어짜기만 했다. 이 순간에도 북한 리스크의 비상벨이 울리고 고령화의 초침(秒針)이 빨라지고 있다. 숙명 같은 국가 재앙의 탈출법을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겐 일본과 벌이는 국력 경쟁의 새로운 변곡점(變曲點)이 찾아온 것 같다. 우리는 열심히 뛰었고 2000년대 들어 일본과 국력 격차는 급속히 좁혀졌다. 드디어 비원(悲願)의 일본 추월이 가시권에 들어온 듯했다.

그러나 지금 펼쳐진 상황은 우리의 기대가 착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엔 급제동이 걸려 3% 성장도 버거울 정도가 됐다. 가계 부채와 취업난(難), 빈부 격차, 복지 수요 같은 온갖 문제가 어지럽게 꼬인 채 우리 앞에 놓여있다. 도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해결의 물꼬를 터야 할지 모를 총체적 곤경에 빠졌다.

일본은 아베 정권 출범 이후 반전(反轉)의 실마리를 찾아낸 듯 보인다. 무제한 돈을 풀어 디플레를 탈출하겠다는 '아베노믹스'는 지극히 단순한 양적(量的) 처방이고 성공할지도 불투명하다. 그런데 일단은 이 무모한 정책이 먹히고 있다. 경기가 좋아지자 기업들은 번 돈을 종업원에게 나눠주겠다며 월급 올려주기에 나섰다. 정치 리더의 물꼬가 일본 전체에 호(好)순환의 연쇄 흐름을 만든 것이다. 리더십이란 이렇게 한 국가의 분위기를 통째로 바꿔놓는다.

지난 시절 일본이 부러워했던 우리의 주특기는 강력한 리더십이었다. 정치권력이 주도권을 쥐고 국가 에너지를 결집해 단기간에 일본을 따라붙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다. 일본은 아베 정권의 리더십이 국가 활력을 되살리는 구심점 역할을 해내고 있다. 반면 우리는 심각한 리더십 위기에 빠졌다. 대통령의 리더십은 인사(人事)부터 엉망으로 만들었고, 온 나라가 정파와 이념으로 쪼개져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기분은 나쁘지만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조롱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 없이 북한 리스크를 키워온 19년 허송세월이 아쉽고, 고령화 폭탄을 수수방관하는 지금의 태평함이 겁난다. 무엇보다 몇몇 대기업의 성공에 취해 일본을 다 따라잡은 양 우쭐했던 착각이 아프기만 하다.

[chosun.com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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