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 글

회광반조(回光返照)

zephyr 2015. 12. 7. 18:23

 

 

옛말에 회광반조란 말이 있다고 한다. 빛을 돌이켜 비춘다 정도로 문자해석을 할 수 있다. 혹은 더 나아가면 자기를 반성한다. 혹은 성찰한다 정도로 해석하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적용이 안 되어 나하고는 무관한 문자에 머물고 만다.

모든 물질의 빛은 자기 자신은 비추지 못하고 나 이외의 밖을 비춘다. 그래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한다. 우리 몸의 육안의 눈도 밖으로만 비추지 정작 자기 내면의 느낌을 감각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감각해야 할 방향은 밖이 아니라 안쪽인 나의 몸이요 나의 내면이다. 그래서 회광(回光)은 밖을 보는 빛을 안으로 돌려 내 몸과 나의 내면을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등잔이 등잔 밑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밖을 보는 시선을 안을 보는 시선으로 돌림이 회광이다. 이것이 물성의 눈 육안(肉眼)의 눈을 영안(靈眼)으로 차원 변경하는 시작이다.

이렇게 방향을 안으로 돌림은 걸음마에 불과하다. 이제 힘을 길러야 한다. 반조를 해야 한다. 처음에는 반조가 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힘을 길러야 한다. 자기의 생각, 말,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해야 한다. 우선 행동을 관찰해야 한다. 몸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줄 대중잡고 안 움직이면 안 움직이는 줄 대중 잡아야 한다. 크게는 목, 팔, 허리, 다리 등 좌우상하 앞뒤로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이 관찰이며 반조의 시작이다. 움직이나 안 움직이나를 항상 봄이 있다면 한 눈이 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자기가 하는 자기 말소리를 자신의 귀로 듣기 시작해야 한다. 말하는 순간만이라도 깨어서 들어야 한다. 내 말소리이지만 내 말소리도 남의 말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말이 나를 이끎이 아니라 말에 주체성이 생겨 주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하고, 안 하려면 안 하게 된다. 말이 산만함에서 나옴이 아니고, 고요와 안정에서 나오게 된다. 반조의 공덕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닌 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기 시작해야 한다. 더 깊은 반조의 시작이다. 생각의 중얼거림, 마음의 중얼거림, 감정의 중얼거림, 느낌의 중얼거림 모두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차츰 고요가 찾아온다. 침묵이 찾아온다. 이 고요는 안정감이다. 안락이요 안식이다. 아무 걱정도 없고, 싸움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평안이다.

이때 비로소 반조가 가능해진다. 관찰자가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대상을 관찰함이 아니라 보는 자가 보이는 자이고 보이는 자가 보는 자이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항상 보게 된다. 항상 무한한 하늘을 보게 된다. 항상 고요를 보게 된다. 항상 침묵을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들 각자에게 있는 내면의 하늘이다. 이 하늘 없는 사람이 없다. 무심의 하늘이다. 이 빛은 있다 없다 하는 빛이 아니다. 이 빛은 이미지가 아니다. 이 빛은 각성의 빛이다. 깨어있는 빛이다. 각성이 각성을 각성하는 것이다.

방향을 나의 몸 내면으로 돌림이 회광이요. 자기의 생각, 말, 행동을 관찰하다가 궁극에 관찰자 자신을 보게 됨이 반조이다. 봄이 봄을 보는 것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둘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이론도 성리도 아니다. 실재이고 진실이다. 이것이 합일의 눈이고 한 눈의 복원이다. 회광반조에는 이런 비밀이 들어있다.

출처: 圓大 김대영님 블로그에서

'모음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인이 가장 많이 쓰는 500 문장  (0) 2016.01.07
내 기분을 바꾸는 단 한 마디   (0) 2015.12.18
부부싸움 5계명  (0) 2015.11.17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0) 2015.11.11
人間이 克服해야 할 것들  (0) 2015.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