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봉꾼을 정승으로 만든
一朶紅의 사랑 이야기 ♥
조선 선조 때 錦山(금산)에서 태어난 一朶紅(일타홍)이 어떤 연유로 "한 떨기 꽃" 이라는 妓名(기명)으로 기적에 오르고, 10대 후반에 한양으로 올라오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대에 뛰어난 용모와 노래 솜씨 그리고 춤으로 이름을 날렸던 일타홍은 비록 기녀 신세였지만 그녀에게는 남다른 꿈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벼슬길로 나아갈 수는 없었지만 기상이 크고 호방한 낭군을 만나서 자신은 이루지 못할 꿈을 대신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총명하고 영리했던 일타홍은 미모까지 겸비한 당대의 명기로서 중요한 연회에는 빠지지 않고 불려 다녔다. 게다가 시문에도 밝고, 관상을 보는데도 뛰어나 여러 남자를 상대하면서 꿈에 맞는 낭군을 찻고 있었다.
일타홍이 권문세가의 路柳墻花(노류장화)가 되어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세가인 이 판서의 잔칫집에 불려가 술 시중을 들고 있었다. 당대의 정승과 전직 대신들이 참가한 술자리가 자못 위엄스럽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자 사이사이에 앉은 기생들이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대감들의 비위를 맞추었다.
차츰 취흥이 돌고 화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난봉꾼 같은 젊은 남자가 술자리에 끼어들었다. 허락도 없이 음식을 마구 집어먹으며 술자리를 휘젓고 돌아다니자 점잖은 대감들의 얼굴에 노기가 가득했다. 그 난봉꾼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글 공부라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던 沈喜壽(심희수) 였다.
술과 여자, 먹을 것을 무척이나 밝히던 심희수는 상가 집이나 잔칫집 등 술을 마실 수 있는 자리가 생기면 으레 모습을 드러내고 멋대로 행동하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아예 반미치광이처럼 취급해 상대조차 하지 않고 슬슬 피하였다. 그러나 일타홍의 눈에는 심희수가 왠지 남다르게 보였다.
지금 하는 행동들은 자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일 뿐, 그의 얼굴에는 호탕한 기운이 서리고 눈에는 예기가 번뜩여 대뜸 재상의 재목감이었다. 일타홍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대감들이 둘러앉은 대청마루로 성큼 올라선 심희수는 기생들을 훑어 보더니 일타홍 옆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분위기가 어색해져도 그는 히죽이 웃을 뿐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았다.
일타홍 또한 심희수를 거절하지 않고 공손히 술을 한 잔 따르며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술자리가 다시 화기애애해져 사람들이 심희수를 신경 쓰지 않게 되자, 일타홍은 조용히 심희수를 밖으로 끌어내 말하였다.
"술자리가 끝나면 집으로 나갈 터이니 기다리세요."
잔치를 마친 저녁 무렵 일타홍은 약속대로 심희수의 집 대문을 들어섰다. 심희수와 그의 어머니 박씨에게 인사를 올린 그녀는 모친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마님! 저는 금산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기생 일타홍 이옵니다. 오늘 어느 재상집 잔치에서 귀댁 공자를 뵈었습니다. 모두가 미쳤다고 하나 저의 소견으로는 장차 귀하게 될 상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준비를 하지 않고 헛되게 낭비하면 훌륭한 기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마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오늘부터 화류계를 청산하고 이 댁에 들어와 온갖 힘을 다해 귀댁 도련님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습니다."
"내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면 내 집에 들어오는 것을 어찌 막겠느냐. 다만 집이 가난하니 너같이 호강하던 애가 어찌 참고 견디겠느냐."
"마님! 저는 부귀와 영화를 탐내 이 댁에 오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럴 욕심이면 어찌 가난한 집 도련님을 유혹하겠습니까?"
아들을 포기한 상태였던 어머니 박씨는 일타홍을 기쁘게 맞이하였다. 그날로 일타홍은 심희수의 색시가 되어 한집안 식구가 되었다. 그날 밤 잠자리부터 요구하는 심희수를 일타홍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四書五經(사서오경)을 내놓았다.
"소첩은 살다가 도망가는 일은 없을 것이니, 이 책을 1권씩 떼면 잠자리를 허락하겠습니다."
그러자 심희수는 일타홍을 차지하기 위해 그날부터 盧守愼(노수신)의 문하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심희수는 워낙 머리가 비상했기에 공부를 시작한 지 2년도 안 되어 고금의 詩書를 모조리 통달하여 급제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일타홍은 그런 그가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엄하게 꾸짖었고 심희수의 글공부는 나날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타의에 의해 시작한 공부였기에 심희수는 다시 공부에서 손을 놓기 시작하였고, 일타홍은 심희수가 과거에 급제를 하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나고 만다.
심희수는 뒤늦게 일타홍을 찾아 다녔으나 찾을 길이 없었고, 진심으로 마음을 다잡은 심희수는 공부에 정진하기 시작하였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뒤 마침내 심희수는 2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인 1572년(선조 5) 에는 별시 문과에 급제해 심씨 집안에는 드디어 경사가 났다. 일타홍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짧은 행복
대과에 급제한 심희수는 당시의 관례대로 삼일유가三日遊街(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 친척을 방문하던 일) 를 하던 중 달마 노인이라 불리는 어른의 집에서 드디어 일타홍과 재회를 하게 된다.
일타홍은 심희수가 등과 후 재상에게 인사를 드리러 올 것을 예견하고 미리 와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이별 끝에 함께하게 된 둘은 집으로 돌아왔고, 주위 사람들은 일타홍의 뒷바라지 덕분이라며 모든 공을 그녀에게 돌리며 기뻐했다.
그러나 일타홍의 마음은 한없이 아팠다. 그녀는 천한 기생의 신분이라 숙명적으로 정실부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낭군을 장가보내기로 결심을 한 일타홍은 입술을 깨물며 나직하게 말하였다.
"어머님!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제 아드님에게 마땅한 배필을 얻어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진작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아드님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저의 소원이니 꼭 들어주세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심희수는 일타홍 외 다른 여인과는 부부의 연을 맺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사대부가 기생을 정실부인으로 삼는 것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며 설득하는 일타홍의 뜻을 따라 양반집 규수 盧克愼(노극신)의 딸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일타홍은 갓 들어온 새색시를 깍듯이 예우하여 일을 처리할 때도 부부간이나 외동서 간에 말다툼 한 번 없었다. 이 일은 마침내 선조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에 감동한 임금은 친히 두 사람을 불러 그동안 있었던 일을 물었다. 당시 법도로 정경부인 아닌 일개 천기 출신을 임금이 부른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선조가 소원을 묻자 일타홍은 남편 심희수를 자신의 고향인 금산 군수로 제수해 줄 것을 청하였고, 임금은 기쁜 마음으로 윤허하였다.
심희수가 금산 군수로 부임하자 일타홍은 군수의 부실이 되어 금의환향하였다. 그녀는 옛집을 찾아가 부모님을 찾아뵙고, 사흘 동안이나 일가친척을 위로하며 잔치를 베풀어 금산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다.
한편 일타홍은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하여 친척들에게 관청은 여염집과 다르니 함부로 드나들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이별의 슬픔
일타홍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소실인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기도 하고 또 남편을 오랫동안 차지한 것이 정실부인에게 죄스러워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일타홍은 일단 마음을 굳히자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날 삶의 회한이 사무쳐 와 달을 보며 시 한 편을 지었다.
賞月 (달을 보며)
亭亭新月最分明(정정신월 퇴분명)
우뚝 솟은 초승달 오늘 따라 밝고
一片金光萬告情(일편금광 만고정)
한 조각 달빛 만고에 정다워라.
無限世間今夜望(무한세간 금야망)
넓고 넓은 세상 오늘 밤 달을 보며
百年憂樂幾人情(백년우락기인정)
백년의 슬픔과 즐거움 느끼는 이 몇일까.
일타홍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둔 채 유서를 남기고는 저 강을 건너셨다.
遺書(유서)
"서방님! 오늘로써 이별코자 합니다. 원컨대 귀한 몸이니 오래도록 부귀를 누리시고 소첩 때문에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소첩의 몸은 심씨 선산에 묻어주시오".
뜻밖의 일을 당한 심희수는 텅 빈 가슴을 달래면서 며칠을 슬피 울다가 일타홍을 자신의 선산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에 묻기로 결정하였다. 일타홍을 실은 꽃상여가 금강에 이르자 홀연 가을비가 소소하게 내려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구슬프게 했다고 한다.
심희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휩싸여 통곡하면서 시 한 편을 남겼다.
一朶芙蓉載?車(일타미용재이거)
한 떨기 고운 꽃이 상여에 실려
芳魂何事去躊躇(방혼하사거주저)
향기로운 혼이 가는 곳 더디기만 하네
錦江秋雨丹旌濕 (금강추우단정습)
금강에 가을비 내려 붉은 명정 적시니
疑是佳人別淚餘(의시가인별루여)
그리운 내 임의 눈물인가 보다
▲일타홍의 단소 비석 뒷면에 있는 일타홍과 심희수의 시(詩) -
만남과 헤어짐은 하늘이 만든 운명인가?
아! 알 수 없는 삶이여 슬프다! 한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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